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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우울감에 대한 묘사가 몹시 많습니다. 해당 요소가 불편하신 분께서는 읽기를 재고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자기, 회식은 끝나가나요?]

 

죽기 살기로 달려 겨우겨우 마지막 전철에 타자 몰아쉬는 숨 사이로 텅텅 빈 의자들이 보인다. …하기야 이런 시간이니 나처럼 회사에 갈리는 사축 말고 달리 누가 타겠냐마는. 선로를 따라 달리는 금속 상자가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에 차갑게 식어있어, 미어터지는 인파에 숨이 막혔던 아침과 달리 메마른 불모지 같았다. 알코올에 절여진 정신은 지옥같던 러시아워를 회상하며 괴로워하던 나머지 가장 좋아하는 이름으로부터 보내온 문자에 답장 하는 것도 잊고 만다. 그저 멍하니, 창 너머로 빠르게 달려가는 야경을 가라앉은 청록에 넘치도록 담았다.

 

검은 바탕 군데군데 피어난 빛과 뒤섞이는 스스로의 어두운 낯이 슬 보기에도 좋지 않았으나, 거기서 지친 회사원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입 꼬리를 흉하게 일그러트려 괜히 한 번. 나 자신의 안부라도 묻듯이 웃어 보이는 게 전부였다. 나는 몽롱한 채 망연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과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의 간극이라거나 하찮은 본인의 쓸모 따위를 떠올렸다. 속이 죄이듯 아려오는 건 식도를 얼얼하게 태운 술 보다야 항시 내게 핀잔을 주는 과장 놈 덕분일 테지.

 

회식을 빌미로 술을 퍼 마시곤 조금 더 솔직해졌다는 변명에 숨은 대머리는 평소보다 권위적이게 날 과녁삼아 히스테리를 부렸다. 크고 작은 음량으로 내내 고막에 새기었던 건 혀를 차며 탓하는 핀잔, 조롱. 업신여기는 어조의 높낮이. 마음 같아선 엊그제 칸논자카 씨, 바쁘지 않지~? 그럼 이 서류도 마저 처리해 두게. 하고 책상 위에 쿵, 소리가 나게 올려뒀던 두꺼운 서류뭉치로 바쁘지 않으면 네 놈이 하란 말이야! 반항을 크게 내지르며 맨들맨들한 뒤통수에 강 스파이크를 날리고 싶었지만…. 주먹을 쥐어보기는커녕 차마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없었다.

 

열변을 토하던 배 나온 중년 남성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사원 개개인의 능률을 따져보았을 때 회사에서도 나처럼 그늘진 사람을 영업직에 쓰고 싶진 않을 테다. 열심히 하는 거야 개인사정이고, 회사에서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실적일 텐데. 딱히 훌륭한 거래 성사 실적을 자랑하고 있는 건 아니니 고까울 것 없이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인정하면 된다. 받아들이기 싫다는 걸 이유로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모르는 철없는 나이도 아니잖아. 덧붙여 보기 흉하게 악다구니를 쓸 힘 같은 걸 낡은 사축이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이리 수긍하여 마음이 평안하느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도리어 주제를 너무도 잘 알아서, 구태여 상식까지 들먹여가며 아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건 빈 말이라도 결코 유쾌한 일이라 부를 수 없지 않은가. 건조하게 바스라진 자존감이 하롱하롱 내려앉는 순간조차 서글프게도 나는 어엿하게 어른이었다. 불현듯 찾아온 우울감에 축축하게 적셔지거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버린대도 절대 티를 내면 안 되는 어른. 검붉은 추락감이 새어나갔다간 따가운 눈초리에 한껏 웅크려 위축되는 게 당연한 빌어먹을 어른 말이다. 해일처럼 밀려와 죄 찢어발기는, 이토록 날 선 감정이 혹여 남을 상처 입힐까 빈약한 그릇에 가두어 침묵한 해가 벌써 열 손가락을 두 번이나 훑고 스러져갔다.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양복바지 주머니에 들어있을 약봉지가 꼬깃꼬깃 구겨지는 걸 의식하며 지껄인다. 히프노시스 마이크를 쥐고서 꽤 지난 지금에 와서도 쟈쿠라이 선생님의 병원은 상담과 약 처방을 위해 여전히 다니고 있었다. 랩을 하면 신기하게도 목을 죄던 스트레스가 완전히 끊어졌다. 죽어서 바닥을 기던 언어가 생기로 차올라 고유의 색채를 되찾기까지 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그 당시 뿐이었으므로. 아무 생각을 하며 아무렇게나 앉아있으면 전철이 덜컹이는 대로 골이 흔들렸다. 아픈 속을 길어 담아둔 정경도 함께 흔들렸다.

 

거나하게 술을 부어둔 위장에 차마 약을 털어 넣을 순 없었고, 결국 매사 보통과 보통 이하의 기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던 사고가 어김없이 마이너스로 질주했다. 미숙한 나는 내일이 무서워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때가 남들보다 많았다. 어쩌면 내가 하나의 인간이 아닌 회사, 혹은 사회를 이루는 일회성 부품으로서 여겨지는 데에 내심 괴로워한 탓일지도 모른다.

 

꿋꿋하게 버티곤 있지만 억지웃음을 지을 때 마다 숨고 싶었다. 끊임없이 내 역량을 재단하는 사람들 앞에 허리를 직각으로 접어 사죄하면서도 서둘러 도망치고 싶었다. 나름 보람을 느끼는 날도 있기야 했지만 그걸로 터져버린 자기혐오의 둑을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심신을 갈아 넣더라도 후한 금액이 따박따박 꽂히는 통장만 있었다면 좀 덜 힘들었을 수 있었을 텐데. 정직한 숫자로 찍히는, 이 고통의 가치를 확인하며 심심한 위로라도 받을 수 있잖아.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도 될테고? 물론 그냥 해 본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랩 배틀에서 우승을 몇 번은 해야 할 걸? 난 한 번 하긴 했지만 상금을 잃어… 버렸으니까. 나로 한정한다면 적어도 그 몇 번에 더해 꼭 한 번 더 우승해야 할 테다.

 

…헛소리를 참 정성스럽게도 떠올렸다. 그러나 삐걱대는 뇌는 멈추지 않고 자꾸만 우울을 곱씹었다. 왜 역겨울 정도로 부대껴 살아가는 방법만이 바르다고 인정받을까? 그런 게 아무래도 안 맞는 사람도 여기 분명히 있는데. 이윽고 역에 닿아 추워, 추워. 중얼거리곤 손을 맞비비며 계단을 내려갔다. 까딱 잘못하면 헛디뎌 화려하게 구를 것 같아 손아귀에 힘을 들여 난간을 쥔다. 모름지기 도시란 재주껏 몸을 사리는 게 왕도에다 거기 따르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만이 룰이다.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진들 나를 보고 야, 쟤 뭐하냐? 하고 킥킥거릴 비웃음을 떠올리는 게 충분히 병든 이치엔 훨씬 알맞다. 줏대 없이 인파에 휩쓸려 휘청대는 등이 돌이켜 본 기억에도 볼품없었다. 귀갓길에 구두 바닥을 스칠 때 마다 부글부글 들끓던 자기혐오는 현관에 다다르자 폐를 할퀴다 못해 꾹 짓누른다. 가빠오는 숨에 비척이며 조금 다급하게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열쇠를 돌리면 예쁜 라임 색이 가득 들이쳤다.

 

“다녀오셨어요? …문자에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정갈한 눈썹은 가지런하던 태를 아쉬워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한껏 누그러진다. 가방을 받아주는 이는 내게 새로이 내일을 열어준 또 다른 열쇠의 주인.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이와모리 레이치. 그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지만 포기할 수 없어 드물게 꽉 쥐어 잡은 행운이 바로 그녀였다. 이 부분이 얼마 없는 양심을 파고들어 날카롭게 찌른다. 솔선하여 토닥여주어도 모자랄 연하의 연인에게 도리어 틈도 없이 찰싹 붙어 사랑을, 애정을 갈구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길 바라는 건 냉철한 이성을 빼고 판단하더라도 염치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레이 씨를 좋아하는 게 거짓인 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독백을 질겅대자 …우리 자기. 오늘 많이 힘들었구나? 보드라운 레이치의 어깨가 언제나의 다정으로 나를 부축한다. 갓 태어난 아기 기린 마냥 더 이상 팔자도 아니게 된 못난 걸음을 아찔한 각도로 기울어 내딛었다. 바닥을 내리 누르는 발밑엔 푸른 아픔이 묻어난다. 침대에 닿자마자 털썩, 쓰러지듯 몸을 뉘이곤 뻗으니 네온사인에 학대받은 안계가 은은한 조명에 조차 시려와 늘어져 있던 팔 한 가운데로 뻑뻑한 눈을 덮는다. 기분 좋은 회식 자리~…는 아쉽게도 아니었던 것 같고. 으음, 일단은 답답할 테니 옷이라도 조금 느슨하게 해 둘까요? 꽉 조여 둔 넥타이며 부정으로 굳어진 고막을 사근사근한 음색은 녹여내듯 부드러이 풀어냈다. 곁에 있음을 나긋하게 주장하는 적당한 무게감. 온화하게 퍼져오는 체향과 이따금씩 천 너머로 스치는 온기, 소중히 다루어지는 실감과 여유로운 동작…. 좋아하고 또 익숙한 요소 하나하나에 거칠던 호흡을 고르곤 무거운 한숨을 곁들여 운을 떼었다.

 

“…레이 씨.”

 

고작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 자체만으로도 지리멸렬하게 어지럽혀져 있던 마음이 제멋대로 벅차오른다. 기실 이와모리 레이치라는 이름이 붙은 문항에 기재된 나의 마음은 전부 오답처리 되어야 마땅했다. 어쩌면 내가 그녀 곁에 있는 자체가 해악일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허나 그렇더라도 가장 가까이에 있고 싶다는 갈망은 어찌해도 꺼지지 않아서. 도저히 꺼트리지 못할 걸 알기에. 일찍이 깨우쳤지만 깨우치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이렇게 답을 간파하는 게 고등학생 시절, 그렇게나 고민했던 수학 문제를 풀 적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침잠한 시야에 똬리를 틀어 탄식을 일삼던 자조가 재차 톱니바퀴를 굴려 기동하고 있었다. 으응, 여기 있어요. 노란 체크 패턴의 청록 매듭 아래, 잿빛 스트라이프가 그인 셔츠 두 번째 단추를 풀어 내리던 연한 가락이 부름에 응해 잠시 멈춘다.

 

“저는 아마 몇 시간 후면 다시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꺼려하는 사람들 앞에 웃어 보이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야 해요. …어른이니까요.”

 

무진한 노력이 무색하게 애물단지 취급 받았던 게 울컥 떠올라 꾸물대던 주제파악이 어느새 눈가에 고였다. 신세한탄을 하려고 입을 연 건 아니라서, 그대로 팔 너머에 습기를 감춰선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이런 날엔 아무래도 힘이 들어서, 지겹고 충동적으로 모든 걸 그만 둬 버리고 싶어져요. 그럼에도 지금 제가 버틸 수 있는 건… 레이 씨가 곁에 있어주시니까.”

 

“저,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제 모든 걸 내어드려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레이 씨를 아끼고 있어요.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더 잘 해드리고 싶은데… 계속 이렇게… 부족한 채로 레이 씨 옆에 머무르는 게 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서….”

 

술로 떡이 되어선 늦게 귀가한데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뻗어 횡설수설 음침하게 주절대는 여섯 살 연상의 애인이라니. 간단히 텍스트로만 적어두어도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꼴불견이었다. 헛소리를 할 바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레이 씨라면 이런 제 모습도 사랑스럽게 봐 주지 않으실까 싶어서 이렇게 폐를 끼치고 말아요.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짜였구나…. 맺어지지 않는 변명에 썩어 문드러진 감각은 시간을 비정상적으로 소화한다. 그런 가운데 계속해서 독점욕과 헌신을 호소했다.

 

“레이 씨가 저만의 레이 씨였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주시는 것도 사실은, 싫어요. 레이 씨의 웃음이 저에게만 향했으면 하고 바라요. 필요에 의해, 기본적인 예의에 따라 베푸는 상냥함조차 제게만 한정되었으면… 좋겠어요. 과한 욕심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이와모리는 자주 말했다. 자신의 그늘까지 성심껏 헤아려 주는 내가 더없이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레이 씨, 그러한 문제를 떠안아 나누는 건 레이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단지 레이 씨가 허락하지 않아서 저 대신 곁에 설 뻔한 잘난 누군가가 이 자리에 감히 발붙이지 못했던 게 아닌가요? 쌓이는 나이만큼 적립된 건 눈치인지라 상황 판단엔 도가 텄다. 하여 사족 없이 확언할 수 있다. 우리의 인연은 그저 레이치가 다름 아닌 나를 선택해 주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노라고. 팔을 치우고 제대로 눈을 떠, 교제를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성역 같은 연인의 여린 뺨을 거칠한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그래도…… 저로… 만족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더 잘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저만을, 사랑해 주세요. 잔뜩 불안해 하면서도 배덕감 속에 스스로를 겹쳐보았던 꽃말을 퍽 정확히 읊조렸다. 이와모리가 늘 행복하길 바란다. 저마다가 견뎌야 할 고난을 할당받아 태어나는 거라면, 레이치 몫을 전부 다 대신 겪어주고 싶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그녀가 행복을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게 계속 뿌리를 내린 채 있어 달라 말 하는 건 역시 나쁜 짓일까. …위선적인 물음 뒤엔 금세 공허한 긍정이 발맞추어 찾아왔다. 욱신, 심장이 크게 동요한 뒤에야 어울리지 않게 확신한다. 이와모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줄 테다. 이렇게나 그녀를 원하는 내게 희망했던 농도를 넘어 진하게 사랑을 쏟아줄 것이다. …적어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해 주는 지금의 레이치라면.

 

바르작대는 내가 자칫 비참해 보일 수 있겠지만 방금의 망발은 지극히 오만했다. 동시에 비틀비틀 집으로 오면서 각혈처럼 게워낸 수많은 문장 중에서도, 가장 헛되지 않은 발언임이 틀림없었다. 표현 그대로 한결같은 이와모리인지라 막연한 두려움은 그녀가 내게서 돌아서는 망상을 증폭제 삼아 더욱이 몸집을 키운다. 뺨에 머물렀던 손을 레이치의 등 뒤로 보내 무너져 내리는 이 가슴에 세게 끌어안으면, 레이는 제 두 팔이 꼭 쓰러지는 나를 받아주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결여된 안식을 전해주려는 듯 품에 얽매여주었다. 여태 흐린 하늘, 이지러지는 진눈깨비 아래 달도 보이지 않아 모든 게 불확실한 이 밤. 내 덧없는 찰나엔 오직 사랑만이 유효했다.

 

 

 

어딘가 위태로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엔 이미 늦어있었다. 여섯 살 연상의, 다정하고 그늘이 있는 그 남자. 칸논자카 돗포. 사소한 계기로 이어나가던 만남이 언젠가부터 반드시 다음이 있는 사이로 되고, 두 사람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면서 나는 단순히 인터뷰나 랩 배틀. 마디가 도드라진 마른 손으로 직접 써 내린 리릭만으론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그에 대해 차차 알아가게 되었더란다. 추천한 의료기기로 건강을 찾아가는 고객의 소식에 기뻐하고, 기르던 다육 식물의 작은 성장에 미소하는. 다정한 내 연인의 우울은 내 발끝이 채 닿지 못할 만큼 깊고 탁했다.

 

돗포는 무언가 문제가 생기거나 일이 어그러지면 그 원인을 항상 제게서 찾았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평가 절하. 닳을대로 닳은 비관은 저 자신을 배척하느라 곯아 짓무른 상념 따위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걸 미처 막지 못하기 일쑤였다. 마치 불을 삼킨 이 처럼 자책으로 아파할 때 마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빠져본 적 없는 규모의 감정에 하릴없이 떠밀려가는 손을 잡아 같이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칸논자카에겐 충분히 그 날 하루의 기분이 송두리째 흔들려 휘청거릴 만큼 큰일이었다. 사회의 입맛에 따라, 바라는 인간상에 맞게끔 정형화된 틀에 웅크리길 반복한 탓에 그림자마저 몹시 위축되어 있었다.

 

허나 그런 남자친구가 아주 별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찰나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걸 함께 껴안아 가라앉을 수 있느냐 여부에 달린 게 아니던가. 타인과 섞이어 살아가는 이상 우리 모두는 내보이는 겉과 감추는 속이 있어 입체적일 수밖에 없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시종일관 의연한 척했던 나 또한 멜랑콜리에 물들어 다 싫어지는 새벽이 있는 걸. …그토록 격렬하진 않을지라도.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가진 뭇 사람들의 고뇌와 맞지도 않는 옷에 팔을 끼워둔 칸논자카의 유약함은 일맥상통하므로 호들갑을 떨고 싶진 않다.

 

[자기, 회식은 끝나가나요?]

 

톡톡, 손끝으로 액정을 눌러 전송하곤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거실에 난 큰 창 쪽의 실크 커튼을 살짝 걷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엔 어둠에 감도는 냉기 사이로 진눈깨비가 달무리 대신 가로등의 설핏한 불빛을 품어 이지러진다. 적어 보낸 문자 곁에 읽음 표시는 생겼으나 아쉽게도 답장은 없었다. 심려치 않기엔 애저녁에 귀가 루틴을 깨 버린 현재였다. 이전의 경험을 미루어보았을 때 갑작스러운 회식 일정이 잡히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마지막 전철이 끊기기 전에 역엔 잘 도착 하셨을까?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얇은 금테가 둘러진 검은 시계를 차고 수없이 잔을 꺾는 마른 손목이라거나 직장 동료들의 등쌀에 치여 어색하게 표정을 매만지는 칸논자카의 모습을 허공에 그려본다. …전화를 해 보는 게 좋겠어. 결심했을 즈음, 현관에서 다소 부산스레 열쇠를 끼워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먼저 다녀왔다며 두 팔을 벌려 안아왔을 텐데, 정수리 위 등이 한 번 꺼졌다 다시 켜지도록 돗포는 인사도 없이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척 보기에도 현저히 과음한 상태였다.

 

다녀오셨어요? …문자에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조심스레 서류가방을 받곤 늘어진 무게 중심을 내 쪽으로 쏠리게 해 부축한다. 칸논자카는 머리가 핑핑 도는지 어질러진 제 숨을 주워 담기 바빴다. 정장 바지를 걸친 긴 다리가 짧은 복도의 직선을 따라 힘겹게 내딛길 거듭했으나 발걸음은 보람도 없이 침묵 가운데 잔뜩 흐트러졌다. 그런 돗포를 침대에 뉘이며 귓가에 담았던 건 삭이고 삭이다 웅얼댄, 나를 좋아하는 게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애달픈 혼잣말이었다.

 

“…우리 자기. 오늘 많이 힘들었구나?”

 

침대에 칸논자카를 뉘이자 그는 동공에 올곧게 내리는 조명이 부담스러운지 팔로 눈가를 가렸다. 감히 공감을 해 주지는 못하지만, 함께하며 삐죽빼죽 아찔하게 솟는 우울의 대처법을 몇 가지 체득해 두어 실행에 옮긴다. 과거의 불쾌함이라도 칸논자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싫은 기분에 다시금 링크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여 진정되기 전 까진 디테일한 부분을 일부러 묻지 않았다. 뻗어버린 옆에 앉아 애정 어린 라임에 긴 속눈썹을 드리워 그를 응시한다.

 

“기분 좋은 회식 자리~…는 아쉽게도 아니었던 것 같고. 으음, 일단은 답답할 테니 옷이라도 조금 느슨하게 해 둘까요?”

 

누운 돗포에 몸을 기울여 야무지게 동여매 둔 타이를 풀어내고 있으면 강한 알코올 향과 함께 나른하고 관능적인 어른의 분위기가 코허리를 휘감는다. 이어서 하강하는 줄무늬 셔츠 중앙에 일렬로 늘어 선 단추를 차례차례 풀어내던 중, …레이 씨. 기식음이 서린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으응, 여기 있어요.”

 

미세하게 떨리는 목청이 그의 눈물샘 사정을 여실히 드러냈지만 애써 모르는 척 했다. 여전히 얼굴 위를 팔로 가로지른 칸논자카는 곧 나에 대한 애정과 곁에 함께하기에 부족한 스스로의 염치없음에 대해 두서없이 역설한다. 필사적으로 나를 갈구하는 모습에 걱정이나 애틋함보단 사랑스러움이 앞서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건 짜릿한 만족감과 진배없다. 돗포가 내게 한참 더 의지하길 줄곧 바라왔다. 기도를 압박하는 둔탁한 설움을 최대한 덜어주고 싶었다. 투박한 손은 어느새 제 시야에 어둠을 길어오길 포기하고 이 뺨을 느리게 쓰다듬는다. 값비싼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힘 조절에 애쓰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좋았다.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저만을, 사랑해 주세요.”

 

요동치듯 흔들리는 초점과 달리 관심의 편중을 강하게 요청하는 박력이 나를 그에게서 결코 떠날 수 없게 하리라는 걸 누차 실감한다. 무너지는 도미노마냥 붙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이 마음의 종착지는 애원하는 눈앞의 남자.

 

“응, 그렇게 할게요. …당신의 레이인 걸요.”

 

귀를 댄 왼 편 가슴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박에 확신을 새긴다. 구태여 말은 하지 않았으나 돗포만 원한다면 나는 이 하룻밤 사이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낯선 거리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도 있었다. 몸담고 있는 지위며 해야만 하는 일들이 가녀린 발목을 잡을 테지만, 인생사 모두가 O 아니면 X로 가는 갈림길이니 매사 우선순위를 견고히 두는 입장에선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하물며 그의 연약하고 작은 세상을 이루는 전부가 영영 나로 이루어져있길 소망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더 이상 그와 나를 따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자의로 그라는 덩굴에 뛰어들어선 온통 엉키어 있긴 하지만, 좀 더 명료하게 해 두자. 이 순간 이와모리 레이치의 최우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칸논자카 돗포. 단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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